10월 6일 일요일 아침 온 가족이 진주로 여행을 갔습니다.
예전에 알쓸신잡 진주편을 보고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요. 토요일인데 하루 종일 온 가족이 집에서 뒹굴거리면 티비와 핸드폰만 하는 모습을 보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
그래서 "내일 아침 7시 출발이야!!!" 버럭쟁이 엄마가 출현하셨습니다. ^^;;
일요일 저녁에 일정이 있어서, 많이 돌아보지는 못하겠지만, 집에 있는 것 보단 나을 것 같아서, 진주여행을 결정하였습니다. 저희가 진주에 가는 날이 마침 진주 유등 축제기간이였습니다. 토욜 밤에 가서 유등도 보고 다음날 천천히 구경하고 올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축제기간이잖아요? 이미 숙소 예약이 끝났더라구요. ㅠㅠ 유등축제는 내년을 다시 기약하기로 하고, 간단히 진주성만 가는거야. 그래.. 집에서 폰 게임만 하는 것보단 낫겠지? 이런 마음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제가 작년에 수원화성을 다녀온 이후로 성들이 좋아졌습니다. 물론 화성보다는 규모가 작겠지만... 그래도 내심 기대를 하였습니다. ^^
진주성으로 네비게이션에 찍고 갔더니 이 '공북문' 앞쪽 주차장으로 안내해주었습니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매표소로 갔습니다.
공북문 :
공북문은 17세기 이후에 그려진 진주성도와 진주 지도에 북쪽으로 나 있는 문입니다. 공북문의 공은 '손을 모아 가슴까지 들어 올려 공경한다'는 뜻이고, 북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인 북두'를 뜻합니다. 따라서 공북문은 "북쪽에 계시는 임금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공경의 뜻을 표한다"라는 의미를 가진 문입니다. 공북문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진주성의 실질적인 정문이며 주 출입문으로 도청 격인 관찰사영과 경상도 우병영이 소재했던 진주성의 주된 문으로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고유하던 자리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원래 진주성 관람시 요금이 있는데요. 축제 기간이라서 무료로 입장을 하였습니다.
주차요금표입니다. 그런데 주차장이 협소하여 주차하기 힘드실 것 같습니다. 저희가 10시 전에 도착했는데도 거의 만차였습니다. 아마 축제기간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들어가자마자, 성문 좌우에서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몇 가지 체험을 하고 길을 따라 올라가니 바로 오른쪽에 '김시민 장군' 동상이 있었습니다.
김시민 장군 동상 :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호국충절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한 진주성 수호상으로 2000년 1월 1일 제막했습니다. 김시민 장군의 본관은 안동, 자는 면호, 시호는 충무입니다. 무과에 급제, 훈련원 판관이었을 때 군사에 관한 일을 병조판서에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않아 관직을 버렸다가 1591년(선조24) 진주판관이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천, 고성, 진해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올라 금산(김천)에서 다시 적을 격파했습니다. 왜적의 대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진주목사가 되어 불과 3,800명의 병력으로 6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격퇴하고 대첩을 이루었으나, 김시민 장군은 이마에 적탄을 맞고 순국했습니다.
조금 더 올라가면 마을을 재현하여 둔 것처럼 꾸며져 있었습니다. 진주성 우물이 있다고 해서 들어가 보았습니다.
이렇게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모양을 재현해두었더라구요. 이 우물이 모형인 줄 알았는데, 안에 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주성 안내책자에 우물에 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진주성 우물 :
진주성은 삼국시대부터 왜적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쌓은 성으로 당시부터 우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후기 진주성도에 표시돼 있는 3곳의 우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임진년 진주대첩 당시 진주성의 관군과 백성들의 주요 식수원으로 사용됐던 것을 2013년 진주시가 발굴.복원했습니다. 전형적인 조선시대 석축우물로 14단의 토관과 오수 유입 방지를 위한 둘레돌이 확인돼 근대까지 개조와 재활용이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복원된 우물의 크기는 깊이 8.3m, 직경 1.5m입니다.
사진을 찍으라고 날개 포토 스팟들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촉석루와 의암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 문을 통해 들어가면,
'의암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이 나옵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됩니다. 계단이 가파르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촉석루로 내려가는 길... 문 사이로 남강이 보입니다. 남강위에 유등들이 떠 있습니다. 밤이었다면 정말 아름다웠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의암이 보입니다. "위험" 푯말도 보이시죠? 사람들이 많으면 정말 위험할 듯 합니다. 조심조심하셔야 합니다.
의암 :
의암은 임진왜란 때 논개가 순국한 바위를 말합니다. 조선 선조 26년 (1593) 6월 29일 (음력)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명의 민·관·군이 순절할 때 논개도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했습니다. 이에 논개의 의열을 기리고자 진주의 선비와 백성들은 이 바위를 '의로운 바위' 즉 의암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인조 7년(1629) 정대륭이 바위의 벽면에 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겼습니다. 위험한 바위라 하여 위암이라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강에 떠 있는 유등과 의암을 보고 다시 촉석루를 보러 올라갔습니다. 신발을 벗고 촉석루에 올라 갈 수 있었습니다.
촉석루 :
진주성의 남쪽 벼랑 위에 장엄하게 우뚝솟은 촉석루는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임을 잘아합니다. 고려 고종 28년(1241)에 진주목사 김지대가 창건한 후 몇 차례의 전소가 있었고 여러 차례 고쳐지었습니다. 촉석루라는 이름은 '강 가운데 돌이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지은 까닭'에 누의 이름을 촉석이라고 했다고 전해집니다. [촉석루기, 하륜] 그리고 촉석루는 진주성의 남장대로서 장원루라고도 부릅니다. 촉석루는 전시에는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소로, 또 과거를 치르는 고사장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국보 제276호로 지정되었지만 전쟁 때 불탄 것을 진주시민들이 진주 고적 보존회를 만들어 국비·도비·시비와 시민 성금으로 1960년에 옛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촉석루 현판 중 북쪽의 것은 정조 때의 명필 송하 조윤형이 썼으며, 남장대는 은초 정명수의 글씨이고, 영남제 일형 승이라는 글씨는 청남 오제봉의 글씨입니다.
그리고, 진주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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